대한건축학회논문집, 2011, Vol.27 No.10, pp. 217-226.
육상궁은 왕의 사친궁(私親宮)으로서 국가의 사전체계에 들어갈 정도로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20세기
여러 왕실 사묘시설의 이동과 철페 과정의 중심에 서 있던 중요한 도시공간이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육상궁을
한양에서 경성, 그리고 서울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일어난 하나의 물리적 사건이라는 관점 아래 그것의 도시,
건축적 변화를 살펴보았다.
먼저, 백악산 능선 아래 경복궁의 서쪽에 자리 잡은 육상궁은 숙빈묘에서 궁으로 추숭된 이후 영조의 행행(行幸)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집권 후기 영조의 경희궁(慶熙宮) 임어, 나아가 경희궁을 중심으로 한 영조의 도심 서쪽으로의 도시재편 의지와 관련을 맺고 있다. 다음으로 육상궁의 변동 시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숙빈묘로 조성되어 육상궁으로 추숭되기까지의 시기로 정당의 배치 및 대문 구성에 변화
가 나타났음을 당시의 기록과 옛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여섯 궁(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이 합사되어 칠궁으로 바뀌는 시기이다. 당시 각 궁의 배치 방식은 합사되기 이전 도성 안에서 이루어졌던 왕의 의례동선과 동일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궁의 설립시기가 아닌 사당에 모신 사친의 연대에 따른 위계를 존중한 것으로 서상(西上)의 원칙에 따라 서쪽을 우위로 하여 배열되었다.세 번째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시기로,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의 확장이 가져온 육상궁 영역의 축소, 왕조시기와 다른 의례동선의 변화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육상궁의 공간구성은 외문, 중문, 내문에의해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눠지는 조선시대 사묘공간의 구성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칠궁으로 변화된 이후에도 육상궁 영역과 각 궁의 영역에서 이러한 기본 구성방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1968년 도로확장에 따른 영역의 축소는 육상궁을 제외한 나머지 궁들에서 각 정당이단일 공간에 묶여 하나의 내문을 사용하는 어색한 결과를 가져왔다.
육상궁의 변화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외세의 압력에 일정부분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마저도 해방 이후 급속한 도시화의 과정 속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배려 부족으로 인해 공간적 위계의 파괴를 불러왔다. 현재의 칠궁이 가진 모습도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간직해야 할 문화유산이지만 배려 없는 유산파괴 행위는 돌이킬 수 없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