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건축학회논문집, 2011, Vol.27 No.5, pp. 145-154.
어의궁(용흥궁)은 임진왜란 이후 일어난 왕실 혼례에서 중요한 별궁(別宮) 시설로 사용되었다. 특히 가례의 중심을 이루는 친영행렬이 궁 밖에서 일어나는 왕의 행위(Performance)로서 도시공간에서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어의궁이 가지는 장소적 중요성은 크다.
본 연구에서는 어의궁(용흥궁)의 성립과 공간구성을 바탕으로 그것의입지가 가지는 도시적 위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봉림대군의 혼례에 맞춰 1631년 대군의 제택으로 처음 건립된 어의궁은 용흥궁 이외에도 하어의궁, 어의동 본궁 등으로 불리며 인조의 잠저인 상어의궁과 구분된다. 1638년 인조와 장렬왕후의 가례가 처음 거행된 이래 19세기까지 총 16차례의 가례가 치러진 조선후기 중요한
별궁(別宮)시설로 기능하였다.
둘째, 기록과 옛 지도를 통해 살펴본 어의궁의 위치는 동부 숭교방, 현 효제동 22번지 일대이다. 이전까지 별궁의 역할을 수행하던 서부 양생방(현 서소문동)의 태평관에서 어의궁으로 별궁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조선후기, 창덕궁이 위치한 도성 동쪽을 중심으로 하는 도심 구조가 공고하게 자리 잡아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다시 말해, 도심에서 일어나는 왕의 중요한 행차 중 하나였던 친영행렬이 보여주는 동궐에서 어의궁까지의 경로는 그 행렬의 중요성으로 볼 때, 당시 도심 중심 가로가 창덕궁을 중심으로 어떻게 형성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근거자료가 된다.
셋째, 영조-정순후 가례에서 보이는 영조의 친영행렬은 어의궁과 동궐인 창덕-창경궁을 중심으로 당시 도성 내 중심가로의 역할을 수행했던 세 갈래 길을 보여준다. 홍화문~종로, 파자교~연지동, 파자교~돈화문에 이르는 이 세 길은 국왕의 행렬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의 폭원을 확보하고 있던 중로(中路) 이상의 도로로서, 이현시장, 종로 시전, 그리고 돈화문 앞 관청가와 각각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도심 가로로서의 의례적 역할과 함께 정치적, 상업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넷째, 18세기 동궐과 어의궁을 오가며 일어난 영조의 친영행렬은 창경궁에서 시작하여 어의궁에 나아갔다가 창덕궁 돈화문을 거쳐 다시 창경궁으로 돌아와 끝을 맺는다. 가례의 중심공간이 된 동궐 내 전각은 창경궁 명정전과 통명전이며, 궁 밖에서 이루어지는 친영례의 진행은 어의궁의 안채 영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출궁과 환궁의 동선에서 보이는 경로의 차이는 18세기 도심 공간 속에서 돈화문로가 가지고 있던 상징성과 함께 당시 창경궁을 창덕궁의 일부로 이해하였던 영조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