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궁행행의 변화와 19세기 한성부도시구조

대한건축학회논문집, 2012, Vol.28 No.8, pp. 123-130.

경우궁도-1912지적(휘문고편입)

경우궁도의 캐드화지도작업

설명 discription

이 연구는 왕실 사묘시설 중 하나인 경우궁의 건립 및 이건 과정에서 나타난 왕의 행행동선 변화를 통해 경우궁의 도시 위상과 19세기 한성부 도시공간의 변화과정을 고찰하였다. 순조의 생모 수빈박씨의 향사를 위해 세워진 경우궁은
창덕궁 서측 용호영이 있던 곳에 자리 잡았다. 의궤에 나타나는 초기 경우궁의 모습은 외문, 중문, 내문으로 구분되는 세 영역이 위계에 따라 동서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전각의 배치에 따른 영역 간 이동 동선은 각 문의 위치에 따라 이리저리 꺾인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조선 후기 건립된 일반적인 왕실사묘의 배치에서 정당부터 외문까지 연결된 일직선의 축을 만들어 내는 것과 구분된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다음해인 고종 22년(1885), 경우궁은 원래 위치인 양덕방(현 종로구 계동)에서 순화방(종로구 옥인동)으로 이건 되었다. 이는 경복궁 중건 이후 한성부의 도시공간이 경복궁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대표적인 도시시설물의 변화상으로 볼 수 있다. 이때 경우궁과 궁궐간의 행행동선 변화는 주변시설물의 관계변화를 동반하고 있었으며, 특히 창덕궁-경우궁간을 잇는 고종의 경우궁 행행동선이 운현궁을 경유하였던데 반해 경복궁-경우궁 사이의 동선에는 육상궁, 연호궁, 선희궁 등 경복궁 서측 지역의 시설물들이 포함되어짐으로써 고종의 경복궁 임어로 달라진 궁궐주변 도시공간의 역학관계를 잘 보여준다. 즉, 고종 재위기 경우궁의 이건과 그로 인해 나타난 행
행동선의 변화에는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 중심으로 공고하게 구축되어 있던 조선후기의 도시공간이 경복궁 중심으로 다시 재편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도시공간의 중심을 궁궐에 두고 있던 한성부 시대에, 19세기 말경에 나타난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그리고 다시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도심이 이동해가던 과정에서 도시공간의 변화가 간선도로의 발달은 물론, 주요 시설의 배치 변화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가 된다. 또한 경우궁 이건으로 확인되는 경복궁 중심의 공간 인식은 이후 한성부 도시공간의 근대 이행 과정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대한제국의 선포 이후 새 황궁인 경운궁과 연결되어 경복궁-경운궁을 잇는 새로운 남북의 축을 도성 안에 만들어내는데 영향을 미쳤고, 한일병합 이후에는 식민권력 발현을 위한 시설물과 연결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