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연구, 2014, no.55, 통권 55호, pp.111-138.
송인호, 김제정, 최아신이 2013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 논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대내외에 식민통치의 성과를 선전하고 산업을 진흥시킬 목적으로 여러 차례 박람회를 개최하였다. 박람회의 목적은 총독부의 통치 기조에 따라 시기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1915년의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는 식산진흥과 문명개화를 명분으로 총독부가 문명화를 가져온 것을 선전하여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궁극적으로 동화주의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에 비해 1929년의 조선박람회는 ‘지역성’을 갖게 된 ‘토착형’ 관리들의 주도하에 진행되어, 20년 동안 발전한 조선의 위상을 과시하고 향후 산업을 진흥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따라서 박람회 전시관의 건축양식도 이에 맞게 선택되었다. 즉 1915년 물산공진회의 전시관은 선진성과 근대성을 대표하는 르네상스 양식에 제체션 양식을 가미한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반면 1929년 조선박람회 때에는 ‘지역성’이 강조된 기조 속에서 조선색이 두드러진 ‘조선 양식’이 채택되었다.
경복궁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됨에 따라 조선 수도 한양과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은 훼철되어 갔다. 특히 경복궁에서 개최된 두 차례의 박람회를 통해 대부분의 전각이 훼철되었고, 경복궁의 윤곽과 경관은 일본제국의 의도에 맞게 변화되었다. 경복궁의 중심축 선상에는 일본제국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청사가 자리잡게 되었다.광화문이 가지고 있던 상징성을 새로운 청사가 대신하게 되었다. 또한 옛 조선의 상징이었던 광화문은 경복궁의 새로운 가로축 위에 놓아 총독부 청사보다 낮은 위계를 강조하였다.
경복궁은 누구든 넘나들 수 있고 구경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총독부 청사 권역을 포함한 경복궁 남측 영역 및 광화문이 훼철되고, 두 차례의 박람회와 전차노선의 영향으로 궁장이 철거됨에 따라 경복궁 영역은 희미해졌다. 또한 경복궁 북측 영역은 박람회장의 확장과 총독부 관사 때문에 궁궐의 경계가 나누어지고 성격이 모호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제 경계가 허물어진 경복궁은 단돈 몇 전이면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변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청사와 관사 등 제국의 위엄을 나타내는 식민권력의 중심을 경복궁에 위치시킴으로써 새로운 경관을 보여주려 노력하였고, 근대시설을 그 주변에 배치해 경성의 도시경관을 일본제국의 식민정책에 맞게 변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