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 축조된 한양도성 치성의 형식과 위치

건축역사연구, 2021, Vol.30 No.2, pp. 19-28.

설명 discription

본 연구는 18세기 한양도성 흥인지문 일대 치성의 건설과 관련하여 치성의 개수, 위치, 형태 및 규모, 축성구법을 국가기록, 지도, 사진, 그림, 발굴 자료를 통해 고증하였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18세기 한양도성에는 새롭게 치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양도성의 치성은 영조 29년(1753)에 축성되었으며 삼군영 중 어영청이 담당하였다. 관련된 기록이 문헌자료(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 남아있다. 치성의 설치 개수는 수차례 논의를 거쳐 4개에서 5개로 조정되었다가 최종 6개로 결정(1753년 2월 13일)된다. 하지만 이 같은 공사기록과 달리 실제 치성이 6개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하게 고증되지 않았다. 또한 치성의 설치 위치도 문헌기록과 현황이 다르다. 본래는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6개 전체를 설치하도록 계획하였으나 실제로는 광희문 북쪽에 4개소 광희문 남쪽에 1개소가 확인된다. 이는 1752년 홍봉한이 처음 광희문
북쪽에 치성 4개소를 설치하기로 영조에게 보고했을 때 영조가 광희문 남쪽으로 1개소를 추가 설치할 것을 제안한 내용과 일치한다.
둘째, 현재까지 고증된 한양도성의 치성의 개수와 위치는 5개이며 이는 지적원도(1912년,1929년), 지형도(1921년), 조지로스의 사진(1904)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6번째 치성은 지적원도(1912년, 1929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6번째 치성이 필지의 경계가 아닌 대형 필지 내부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6번째 치성이 포함된 필지는 당시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 소유였음)으로 판단된다. 다른 5개의 치성은 필지의 경계로 표시되어 있거나 대지가 성(城)으로 별도 표기되어 있다. 6번째 치성은 장충단주택지에 포함되어 1934년 개발로 멸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한양도성의 치성은 장방형 형태이며 치성의 면석은 약 45∼60cm의 정방형 성돌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치성의 축성의 시기(영조시기부터 45cm의 정방형 성돌이 성벽 개축에 부분적으로 쓰이기 시작함) 및 인접하여 발굴된 성돌의 크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치성의 기울기는 약 80∼85도 정도로 추정된다. 영조 당시 들여쌓기 공법이 사용되어 성벽을 내측으로 기울여 쌓았기 때문이다.
넷째, 6번째 치성의 형태와 위치는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를 통해 추정가능하다. 김홍도의 행려풍속도(기메 박물관 소장)를 보면 6번째로 추정되는 치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1745년 이후 삼군영이 분계하여 한양도성을 관리하던 담당 군영(어영청)의 구간, 관청 건물(남소영과 어영창), 지형(목멱산), 기타시설(홍살문 등)을 통해 6번째 치성의 위치를 5번째 치성의 남쪽인 현재의 장충동1가 89-1번지 인근으로 판단할 수 있다. 김홍도의 행려풍속도에는 치성 위에 포루가 설치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18세기 치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수문상친림관역도(1760), 근대사진(조지 로스, 1904), 발굴(2009) 등에서는 포루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영조가 성벽에 설치된 포루에 대해 묻는 기록과 포루공사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아 일부 치성에는 포루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김홍도가 치성 위에 포루를 그려 놓은 것을 통해 적어도 6번째 치성에는 포루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치성의 원형을 파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본 연구는 문헌자료, 현재까지의 연구 및 발굴성과를 바탕으로 치성의 개수, 위치, 형식 등에 대해 고증하였다. 향후 한양도성에 대한 추가적인 발굴을 통해 치성에 대한 면밀한 연구 및 확인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