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로(흥인지문)에서 동호로(장충체육관)사이를 중심으로
서울 성곽의 훼철은 1898~1961년에 진행되었고, 일제강점기(1910~45)에 대규모 훼철이 집중되어 있다. 훼철된 성곽 주변은 일제강점기에 근대적 도시조직으로 개발되지만 다른 도시의 성곽 주변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1800년대 말부터 시작된 조선의 자발적인 근대화는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식민지 지배권력에 의한 타의적 근대화로 변화되고 서울은 식민지 근대도시로 변하게 된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서울의 도시 구조는 식민지 지배권력에 의해 구시대의 유물로 평가절하되고 식민지 근대도시 구현을 위해 변화되거나 사라졌다. 오랜 시간 도시의 경계였던 서울 성곽은 조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자 전근대의 상징으로 식민지 근대도시 구현을 위해서는 훼철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920~30년대 서울의 급격한 인구증가가 야기한 도시 공간확장도 성곽 훼철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성곽훼철은 오랜 역사를 가진 모든 도시의 근대화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서울에서도 외형상으로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서울 성곽 훼철이 도시변화에 따른 자발적 요구가 아닌 식민지 지배권력에 의해 이루어진 변화라는 차이점은 서울의 근대화를 식민지 근대화로 만들었다.
본 연구의 목적은 두 가지로, 다른 도시와는 성격이 다른 서울 성곽의 훼철과정과 주변 도시조직변화 분석이다. 성곽의 훼철은 성격과 의미에 따라 1898~1924년과 1925~1961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1898~1924년의 성곽훼철은 도성과 성저십리라는 도시경계의 소멸과정과 기존 도시공간이 식민지 도시공간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조선시대 후기 서울은 상업 도시로 변하면서 남서쪽 성저십리는 도시공간으로 편입되었다. 성곽은 도시공간이 확장되었음에도 심리적 공간구분을 상징하는 물리적인 실체로 남아 있었다. 1898~1924년에 성곽 훼철은 도시공간이 확장된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나 돈의문(새문안길)에서 숭례문(숭례문) 사이에 집중되었고, 도성과 성저십리로 나누던 전통적인 공간구분의 물리적 실체도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성곽 주변은 조선 후기부터 도시화가 진행되어 성곽훼철이라는 도시구조의 변화에도 대규모의 도시조직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