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박물관, 2022.
동대문 방산(芳山) 일대, 출판인쇄 문화의 발달
동촌 지역(동대문 안)은 조선말까지 자연 상태의 작은 촌락 정도가 형성된 곳으로 산림과 농지가 주를 이루던 곳이었다. 이런 경관은 인구가 급증한 일제강점기인 1920-30년대 이전까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촌파 문인이었던 윤기(1941-1826)는 『무명자집(無名子集)』에서 동촌 지역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제 동대문(東大門) 안의 초가집을 거처로 정했는데, 사람들은 서울 동쪽 고을에 짙푸른 초목의 기운이 울창하다고들 한다. 또한 먼 산이 궁궐 북쪽 산록과 함께 새가 날며 춤추는 듯 한 기상을 뽐내고 있다. <중략> 늙은이와 아이들은 모두 도회지에서 태평한 세상을 즐기고, 그윽한 꽃과 이름 모를 새들은 각기 도성 안 숲 속에서 만족하며 살아간다. 나는 내 집을 사랑하여 스스로 조롱하고 스스로 변명해 본다. 인적 없는 골짜기에 발자국 소리 끊기니 사람들을 떠나 외로이 사는 것이 한탄스럽다”
동촌은 지리적으로 특정된 범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적 범주다. 한양의 동쪽으로 대략적으로 종묘(종로 4가)에서 동대문(종로 6가)까지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1910년대 작성된 지도인 1921년 1/10,000 지도에서 동촌은 종로와 청계천 중심으로 백색이 넓은 공지들이 분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도심과 달리 논밭 등의 미개발된 미간지(未墾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청계천 주변으로는 산처럼 쌓인 토사(그림4,5의 좌측 중앙)가 확인된다. 이 토사로 이루어진 산은 ‘방산’이다. 청계천의 원래 명칭은 개천(開川)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하천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청계천은 홍수 등으로 하천이 범람하고, 토사와 오물이 쌓이는 등의 문제가 자주 발생했다. 따라서 조선 초부터 많은 공사들이 이루어졌다. 청계천이 현재에 가깝게 직선화된 것은 1760년 영조가 대대적인 준천 사업을 하면서 부터다. 이는 『준천계첩』으로 남아있고, 영조가 중요한 치적사업으로 기록할 만큼 대규모 토목사업이었다. 준천으로 청계천에서 퍼 올린 토사와 오물은 동대문 오간수문 안쪽 청계천가로 쌓아 가산(假山)이 만들어졌다. 가산은 청계천의 둑방이나 제방으로 이를 의미하는 ‘방산(防山)’으로 인식되었을 것이고, 세월이 흘러 이 가산에 식물들이 자라고 꽃이 피면서 ‘방산(芳山)’즉‘향기 나는 산’으로 지칭되었다. 현재 중구 방산동과 방산시장의 ‘방산’의 연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