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역사연구, 2020, vol.29, no.6, 통권 133호, pp.89-100.
본 연구를 통해 삼군영의 관리구간별 각자성석, 축성구법, 성돌의 특징과 차이점 등을 파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정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1704년부터 1907년까지 삼군영에 의해 제작된 각자성석을 검토한 결과, 삼군영에 의해 제작된 각자성석에는 성곽을 수축한 연대, 감독관, 석수 등 기술자의 이름, 공사의 시종(始終)점 표시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어 한양도성의 개축 및 관리를 기록한 국가기록(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군영등록 등)과 현장기록이 정확하게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삼군영에 의해 제작된 각자성석은 각자를 새겨놓은 위치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영조대까지는 주로성벽 체성의 하단 기저부로부터 5단 또는 6단 하부에 각자를 새기고 정조초기부터 여장에 각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따라서 각자성석의 위치를 통해 대강의 성벽 개축연대를 파악할 수 있다. 정조대 여장에 제작된 각자성석은 일부 연구에서 여장에 각자를 새기기 시작한 시점으로 제시한 순조대보다 앞선 것이다.
삼군영의 관리구간에서 발견된 각자성석 중에는 현장의 감역관 또는 석수(石手)가 감독관으로 부터 정식으로 공사완료검수를 받기 전에 체성이나 여장에 “완축(完築)”이라는 각자를 새겨 사전점검을 시행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여러 개의 각자성석이 발견된다. 이는 18세기 삼군영이 도성을 담당하면서 성곽개축을 위해 전문무관 및 석수를 고용하고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시행한 공사관리시스템으로 판단된다.
셋째, 기존의 연구에서는 한양도성을 성돌의 모양과 크기를 기준으로 크게 4시기(태조대, 세종대, 숙종대, 순조대)를 구분해 왔다. 그러나 성돌의 모양과 크기만으로 한양도성의 축성시기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반면 각자성석은 한양도성의 변화시점을 보다 세밀하게 구분하는데 도움이 된다. 각자성석을 통해 확인한 결과 삼군영이 한양도성을 개축한 18세기에 나타나는 성돌의 크기는 기존의 45×45cm에서 영조대를 기점으로 50×50cm이상으로 커지기 시작해 영조말(영조 45년 이후) 부분적으로 60×60cm 성돌을 사용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성돌이 60×60cm으로 규격화된 것은 정조대 이후이다. 각자성석은 성벽의 축성연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현장기록이다.
넷째, 18세기에 이르러 한양도성의 축성술은 비약적 으로 발전한다. 성돌의 쌓는 방식에서 성돌의 들여쌓기로 인해 내측으로 기울였던 성벽이 90도에 가까운 수직으로 변화한다. 또한 성벽을 개축할 때 성돌을 서로 밀착시켜 돌이 성벽에서 빠지지 않도록 하는 그랭이 기법의 사용이 빈번해 진다. 그리고 성돌의 표면을 수직으로 맞추기 위해 정으로 다듬기 시작했다. 이 같은 그랭이 기법과 정다듬 가공에서도 시기별로 차이를 보이는데 성돌의 모서리가 서로 맞물리도록 그랭이질하는 방식이 나타나는 것은 영조 이후이며 이 때부터 면석을 거칠게 다듬는 가공방식이 적용되기 시작한다. 성곽의 축성술 역시 각자성석을 통해 적용시점을 구분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성돌의 크기와 축성술의 변화시점은 영조와 정조시기이다. 본 연구는 각자성석으로 통해 한양도성의 개축연대, 성돌 및 축성술의 변화시점을 파악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