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역사연구, 2021, vol.30, no.4, 통권 137호, pp.79-90.
본 연구는 한양도성의 발굴성과와 현장조사를 통해 18세기 개축된 한양도성의 특징과 축성기법의 변화시점을 시기별로 세분하여 제시하였다.
한양도성의 축성기법은 18세기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이 시기에 적용된 축성기법은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걸쳐 개축된 한양도성에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8세기에 완성된 한양도성의 축성기법은 한양도성 축성기법의 최종 완성단계를 보여준다. 18세기 숙종, 영조, 정조시기의 축성술의 진화와 차이는 발굴구간(송월동, 남산회현, 동대문 디자인플라자)과 개축구간을 통해 확인된다. 특히 각자성석은 개축시기를 세밀하게 편년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를 통해 도출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한양도성의 축성기법은 크게 네 시기(14세기 말, 15세기, 18세기, 19세기)로 구분되고 있는데 축성기법의 변화시점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 한양도성의 축성기법의 변화는 14세기 말(태조연간), 15세기(세종연간), 18세기 전반기(숙종연간), 18세기 후반기(정조연간)로 구분되어야 한다. 기존 연구에서 제시하고 있는 19세기 순조이후의 축성기법은 이미 18세기 중후반인 영조와 정조시기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18세기 기술적 진보를 통해 나타난 축성기법이 정조시기에 이르러 성곽 개축공사에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므로 정조(1776)시기를 분기점으로 나누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18세기 개축구간을 통해 축성기법의 변화시기를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18세기 전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간은 송월동 발굴구간인 76(帝)이며 18세기 중반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간은 남산회현 발굴구간, 22(收), 23(冬), 26(餘), 57(果), 61(菜), 80(皇), 94(虞) 등 이다. 18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구간은 8(荒), 11(盈), 25(閏), 30(呂), 82(制), 91(讓) 등 이다. 91(讓)은 영조 및 정조시기의 개축구간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18세기는 한양도성 축성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기술의 변화도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18세기 한양도성에 적용된 축성기술의 변화는 체성의 형태와 각자성석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체성에서는 면석의 가공기술, 성돌 쌓기방식, 성벽의 단면과 기울기의 변화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의 변화시점은 현장기록인 각자성석과 국가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시공과 관련된 각자성석이 18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주로 성돌쌓기와 관련된 각자석성이다. 정조대부터 성돌이 대형화되고 체성을 수직에 가깝게 쌓기 시작하면서 수평줄눈을 맞추기 위해 ‘三’자와 ‘十’자를 체성의 하단부로부터 상부까지 일정 높이마다 새겨 놓았다. 또한 곡선구간에는 곡면을 시공하기 위해 ‘曲’자를 새겨 놓았다. 이러한 각자성석은 영조시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며 18세기 축성방식의 특징과 축성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현장 시공기록이다.
셋째, 18세기 전기(숙종연간)에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 축성기법은 영조대를 거쳐 정조시기에 완성된 기술로 정착된다. 숙종대에는 주로 체성에서 변화가 나타난다. 18세기 전반기 성돌은 45cm×45cm의 정방형 형태로 커지고 수평줄눈이 형성되기 시작하며 들여쌓기로 인해 성벽은 75도∼80도 정도로 기울어진다.
그런데 숙종대 시작된 축성기법은 영조대까지 과도기적인 변화를 보인다. 대표적으로 기저부의 구축방식에서 변화가 발견된다. 전기에 해당하는 숙종대에는 기존의 기단석을 재사용하지만 영조대에는 14세기 또는 15세기의 기단석 위에 새롭게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면석으로 쌓기 시작한다. 이는 면석의 크기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면석의 크기가 60cm×60cm로 커지기 시작하는 시점은 순조연간(1800년)이 아닌 영조 말부터인데 면석이 커지면서 체성의 구조적 안정을 위해 기단부를 수평이 되도록 재조정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새롭게 기단석으로 설치하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넷째, 18세기 후기(정조연간)에 나타나는 축성기법의 특징은 크게 성벽 기저부의 구축방식, 체성부의 성돌 쌓기와 줄눈시공 패턴, 성돌(면석)의 가공방식, 성벽의 기울기 등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1)성벽 기저부의 구축방식에서는 영조대 개축된 성벽에서 기단석이 체성의 면석보다 돌출되는 변화가 나타난다. 이는 면석이 들여쌓기로 인해 후퇴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정조대 개축된 성벽에서는 돌출된 기단석이 사라진다. 이는 성벽의 기울기와도 관련이 있는데 성벽이 수직에 가깝게 시공되면서 수직하중이 증가한 반면 상대적으로 하단부의 수평하중은 감소하면서 나타난 변화로 판단된다.
(2)성돌 쌓기와 줄눈시공 패턴에서는 숙종대 불규칙하게 등장하던 줄눈이 영조대 보다 규칙적으로 나타나다가 정조대에 이르러 좌우 수평줄눈이 정연하게 맞춰진다. 정조대에는 수직 통줄눈이 보편화된다.
(3)성돌의 가공방식에서는 숙종대 사각형으로 가공되기 시작하던 성돌이 영조대에 일부 대형화되다가 정조대에 약 60×60cm크기의 면석으로 고정된다. 또한 성돌의 전면은 성벽의 기울기 및 곡면에 맞춰 가공되는데 특히 성돌 뿌리의 길이가 길어지고 성돌의 아랫면은 수평으로 다듬어 사용한다. 성돌의 밑면을 평평하게 마름질하여 사용하게 되면서 성벽의 기울기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4)성벽의 기울기에서는 숙종대 등장한 들여쌓기 방식으로 약 75도 정도의 기울기가 되었다가 들여쌓기 방식이 유지되던 영조대에 80도 정도로 변하였으며 정조대에 이르러 점차 들여쌓기 방식이 사라지면서 85도 이상 수직에 가깝게 되었다.
본 연구의 성과는 18세기 한양도성의 축성기법의 변화를 시기별로 정확하게 세분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존 축성기술의 변화시점을 새롭게 제시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한양도성의 축성기술의 발전과정을 역사적 사료, 발굴자료, 현장기록을 바탕으로 확인하고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향후 한양도성 축성기법의 특징과 변화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