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화+서울』 조선 기와지붕만 겨우 남겨놓은 집

vol.147 서울건축읽기(서울문화재단)

설명 discription

한옥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조선시대 기와집 정도다. 하지만 조선시대 기와집은 사대부가 사는 소수의 규모가 큰 주거 양식이었을 뿐이고,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기와집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작은 규모의 기와집이다. 일반인들의 한옥에 대한 인식은 일제강점기가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0년대 경성의 인구 급증으로 주택난이 심각했고, 이에 주택 공급을 위해 도성 내에서 시작해 도성 밖까지 대규모로 개발되었다. 이렇게 개발된 주택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기와집 형식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조선집이라 불렀다. 다만 조선시대 집과는 달리 밀도가 높아지고, 생활방식이 변화된 도시에 적합하게 새롭게 개발됐다4) ‘경성시가지계획령’으로 조성된 ‘돈암지구’는 기와집이 대량생산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신도시였다.

80여 년의 세월이 느껴지는 신흥목공소의 간판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가옥 수리’, ‘보이라’, ‘실내 장치’라는 단어들이 있다. 이렇게 덧붙여진 간판들로 인해 조선 기와지붕만이 간신히 보인다. 신흥목공소의 필지는 동서 방향의 일본식 블록 구조의 모서리에 위치해 ‘가각전제’라는 근대적 도시계획법이 적용되어 모서리가 사선으로 잘렸다. 따라서 한옥도 네모반듯한 정형이 아니라 비정형이다. 이런 비정형의 필지와 한옥에는 당시 대량생산된 한옥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옥은 기와집으로 둘러싸인 네모반듯한 마당을 관념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비정형 필지에 구현하는 것은 공간적으로 비효율적이고,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럼에도 억지스러워 보일 정도로 만든 것이다. 이 기와집은 우리의 수백 년의 주거문화7) 와 새로운 문화 사이에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선택하며 적응했으며, 지금 이곳에 기와지붕을 덮고 여전히 서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흥목공소는 한옥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가 지켜야 하는 전통 가옥이다.